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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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리
  • 이흥주 시인·수필가
  • 승인 2019.05.1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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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주 시인·수필가

무쇠도 녹일 듯 세 등등하던 여름날씨도 가을 앞에선 힘을 잃고 만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옷깃으로 스며드는가 싶으면 어느 날 아침 세상이 하얀 서리를 맞아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정지용 시 ‘향수’의 한 구절처럼 이 서리가 비친 아침에는 세상이 깊은 적막 속에 묻히고 마당가 감나무에 앉은 까치소리만이 들린다.

서리는 맑고 조용한 날 기온이 영도 이하로 내려가면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 생기는 현상이다. 서리는 아직 찬바람에 잎을 지울 준비가 덜된 푸른 초목들에게 ‘서리’를 맞히고 만다. 서리를 맞은 초목의 잎새는 하루아침에 삶아놓은 무청처럼 까맣게 변하고 만다. 준비가 되고 말고가 없이 인정사정없는 된서리를 한번 맞으면 연약한 풀잎은 말할 것도 없지만 늠름한 거목도 잎을 지우고 만다. 이렇게 하고나면 세상은 서서히 긴 동토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서리를 맞는 게 초목뿐이랴. 사람도 젊음이 퍼럴 땐 가을 서리는 생각도 못한다. 이럭저럭 길다고만 여기던 노루꼬리 같은 세월이 가고 나면 인간도 서리를 맞게 된다. 윤이 나던 검은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아차 가을이 왔구나 정신이 번쩍 든다. 다만 옛날 보단 서리 내리는 시기가 좀 늦춰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 찰나다. 이를 안다면 펄펄할 때 힘도 아끼는 겸양도 가져야 하고 젊음의 소비도 절약할 줄 알아야 하겠다. 돈도 있을 때 아껴야 하지만 힘도 날 때 아껴 써야 한다. 서리 오는 날이 많아지게 되면 추풍에 낙엽 지는 날도 코앞이다.

자연스레 오는 ‘자연’현상은 막을 길이 없지만 그래도 조금의 여유라도 가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이게 초목과 다른 점이다. 요즘 인간들은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헛소리’를 지껄여 대더니 며칠 못가 또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요란하다. 어쨌거나 나도 여기에 동감하고 나섰다. 앞장섰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서리 맞았다고 늘어져 있으면 서리의 상처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나는 엄동의 동토로 들어가기 전 서리가 내리는 가을일망정 그 기간을 늘이기 위해 운동이라는 것도 열심히 하고 늦바람을 풀풀 날려 글도 열심히 써본다. 귀가 솔깃한 것이 글을 열심히 쓰면 마지막에 흔히 오는 치매란 괴물도 물리칠 수가 있다는 말을 얇은 귀로 듣고는 더욱 열심이다. 이런 쬐끄마한 재주라도 달고 나온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기가 살아서 백세시대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긴다.

이 오기가 오기만이 아닌 게 송해 선생을 보면 안다. 송해 선생은 구십이 넘었는데도 젊은 사람 같이 활동을 하신다. 사람이 다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앞으론 인생 구십이 팔십처럼 여겨질 것이다. 건강을 잘 다스렸을 때의 얘기다. 인생도 건강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내가 이 나이 먹어 깨달은 이치다. 지금이라도 깨달음을 받았으니 감사할 일이다.

서리란 말은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다. 서리를 맞았다고 하면 안 좋은 일을 심하게 당했다는 말이니 서리란 말에 좋은 느낌이 들 수가 없다. 처음 오는 서리가 빨라지거나 늦서리가 늦게까지 오면 농사에 치명타가 된다. 요즘이(오늘이 4월 27일) 조금 이르긴 해도 고추 모 심는 시기다. 이거 심어놓고 늦서리를 맞으면 완전 농사 버린다. 가을 첫서리가 일찍 오면 결실이 채 안된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러니 서리가 어떻게 오느냐에 따라서 농사가 피해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추상(秋霜)같다는 말이 있다. 위엄이 있고 서슬이 퍼럴 때 쓰는 말이다. 가을 추자에 서리 상자다. 가을 서리에 세상 모든 게 숨을 죽여야 하니 생긴 말이다. 요즘 지위가 괜찮은 사람 중에 추상같은 사람이 있다면 사회로부터 금방 소박을 맞을 것이다. 옛날 칼 차고 활 쏘던 장수에게나 댈 수 있는 말이다. 지금은 둥글둥글 화합하고 포용력 있는 사람이어야 시대에 맞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말도 있다. 눈 위에 서리가 덮친다는 말이니 안 좋은 일이 연이어 터짐을 이르는 말이다. 

서리는 오지 않으면 좋지만 때를 맞춰 오면 예측이 가능한 일이니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나이 먹어 내리는 인생의 서리를 생각하여 젊음이 남아있을 때 잘 대비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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