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모더니즘과 모던 걸 김봉자, 비련의 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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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모더니즘과 모던 걸 김봉자, 비련의 애화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9.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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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정지용 시인은 일찍이 1923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동지사대) 영문과에 유학하여 1930년에 휘문고 교사로 재직하였던 모더니즘 詩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절제된 언어와 지적이며 회화적인 이미지 구사와 함께 한국 모더니즘의 詩 ‘유리창’을 남겼다.
모던(morden)은 ‘새로운’, ‘근대적’이란 뜻 말을 가지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주의, 상징주의, 이미지즘 등 다른 문화사조와 함께 유행하였다.
조선 경성에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과 유학생들에 의해 모더니즘 문화가 들어왔다. 그래서 ‘모던 걸’이라 하면 ‘새로운 여자’, ‘근대 여자’ 모던걸, 모던보이 하면 그 당시 청춘남녀에게 낭만적이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옥천출신 모던걸 김봉자 카페여인
1930년대 비련의 사랑 얘기 여주인공인 김봉자 여인은 1904년에 충북 옥천 시골서 태어나서 17세의 어린 나이에 마흔을 훌쩍 넘긴 남자와 결혼하였다가, 2년 만에 이혼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경성으로 상경한다.
그녀는 경성에 와서 병원 간호부로 취직하여 노모와 어린 딸과 함께 살았으나, 생계가 어려워지자, 그 당시 경성에서 유명한 카페인 스타, 태평양 카페, 엔젤 카페에서 여급으로 일한다.
카페 여인이 된 김봉자 여인은 경성제대를 나온 의사 노병운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가정을 가졌던 노병운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번민하다가 마침내 1933년 9월 26일에 한강에 투신자살한다. 이 같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며 그 당시 큰 관심을 끌었다.
이에 콜롬비아 레코드사는 이들의 애달픈 사랑이야기를 ‘봉자의 노래’와, ‘병운의 노래’란 제목으로 유행가를 만들어 가수 채규엽이 불러서 경성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경성 스캔들 ‘봉자의 노래’ 센세이션 
사랑의 애달픔을 죽음을 두리
모든 것 잊고 잊고 내 홀로 가리
살아서 당신 아내 못될 것이면
죽어서 당신 아내 되리라
당신의 그 이름을 목 메여 찾고
또 한 번 당신 이름 부르고 가네
당신의 굳은 마음 내 알지마는
괴로운 사랑 속에 부르고 가네
내 사랑 한강 물에 두고 가오니
천만년 한강 물에 흘러 살리라

‘봉자의 노래’가 레코드로 발매되어 청춘남녀에게 심금을 울렸고 이어 다음 달에는 ‘병운의 노래’가 콜롬비아 레코드사에 의해 발매되었다.
영겁에 흐르는 한강의 푸른 물
봉자야, 네 뒤 따라 너에게 왔노라
오, 님이여 그대여 나의 천사여
나 홀로 남겨 두고 어디로 갔나
수면에 날아드는 물새도 쌍쌍
아름다운 한양이 가을을 올 것만
애틋한 하소연 어디다 사뢰라
나의 천사야 봉자야 어디로 갔노
그대를 위하여 피까지 주었거든
피보다도 더 붉은 우리의 사랑
한강 깊은 물속에 님 뒤를 따르니
천만년 영원히 그 품에 안어 주

여급 김봉자와 기혼자인 의사 노병운의 비련의 애화는 두 연인이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 사랑이 매우 깊어졌으나, 어느 날 그들의 불륜을 알게 된 본처 박 여인이 용산경찰서에 고소를 함으로써 가련한 김봉자 여인은 번민하다가 결국 한강에 투신하였다. 이 소식을 바로 들은 노병운도 다음날 애인 김봉자 여인을 찾으러 한강에 갔다가 홀연히 강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경성은 개화와 함께 들어온 일본 문화인 ‘연인 동반자살’의 유행으로 당시 ‘한강교’는 동반자살을 꿈꾸는 연인들의 장소로 유명했다.
1930년대 ‘구인회’는 문화예술에서 순수성을 내세우며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이효석, 박팔양, 이무영 등 문인과 이종영, 영화감독 김유영 등이 동인을 결성, 경성의 문학계에 새로운 모더니즘 열풍을 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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