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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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69)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6.0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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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영호남비왜지책(嶺湖南備倭之策) 
    
조헌이 일본의 조선침략 의도를 미리 예견하고 왜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에 보내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와 함께 올린 여섯 가지 첨부한 문건 중에 하나가 영호남비왜지책(嶺湖南備倭之策)이다. 

왜적이 침공을 한다면 어느 해안으로 상륙할 것이며, 어떤 통로를 이용해서 공격을 해 올 것인가? 이에 관한 올바른 분석과 판단은 조선방어의 핵심이었다. 조헌은 이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대비책까지 상세하게 조정에 제시하였던 것이다.

비왜지책(備倭之策)이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은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상소를 조정이 묵살했다는 것이 역사의 비극이었다. 조헌의 혜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영호남비왜지책(嶺湖南備倭之策)에서 우리는 그 깊이를 깨달을 수가 있다.

조헌은 왜적이 침공 시 예상 상륙지역을 동남해안이라고 제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적은 호남 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내다보고 대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생각과 달리 지형의 조건과 전례를 분석하여 동남해안으로 판단하였는데 그 근거는 이러하였다.  

▷남해연안은 지형이 복잡하여 향도(嚮導, 길 안내자)없이는 상륙하기가 어렵다.

▷과거에 왜구가 반도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한 것은 남해연안에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남해안으로 상륙하기 위해서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며 서해안 역시 경솔하게 정박할 수 없을 것이다.

▷적은 호남 해안보다는 길에 익숙한 영남 해안으로 침입하여 이곳을 발판으로 북상의 길을 트고 군사를 나누어 호남지방을 육로로 쳐들어가서 장악할 계책을 쓸 것이다.

그는 상소문에서 이러한 까닭에 적은 반드시 동남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단언하였고, 이에 대한 사전 조치를 요청했다. 

“전조(前朝)의 말기에 연안, 배천, 임천, 한산 등지를 약탈하였다 함은 대개 영남과 호남의 동남쪽 모퉁이에 방비가 없었기 때문이므로 조종 조(祖宗朝)께서 중진(重鎭)을 특별히 설치한 뒤로는 비록 적선이 간혹 출발하였으나 방자한 행위를 하지 못한 것은 연해(沿海) 여러 진(鎭)의 정박할 곳을 외국 사람은 실로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흑산도, 추자도 등의 섬에서 복어잡이를 하는 어부를 포로로 얻으면 큰 보배로 여겨서 복어를 많이 주고 향도인(嚮導人)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전하께서는 이를 징계하여 생복어의 진상은 일찍 파하고 시중의 매매도 금하십시오. 그리고 양남(兩南)의 관찰사와 도사에 엄명을 내리어 이 어물로는 요리를 하지 못하게 하고 해채인(海採人 해초를 채취하는 사람)이 먼 섬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지 못한 변방의 장수들은 왕명을 거역한 무거운 죄로써 다스리면 왜적은 결코 향도(嚮導)의 이(利)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전일에 저들이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은 혹은 늙고 혹은 쇠약해져서 이제는 모두가 배를 조정할 수가 없을 것이며 호남 바다의 수로는 여러 차례 지내본 곳이 아니므로 이백 년 동안 한 번도 엿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왜적의 계획은 비록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을 공격하고자 하지만 감히 경솔하게 서해 변에는 정박하지 못할 것이고 여러 차례 지내본 영남지방을 먼저 쳐서 곧장 올라오는 길을 열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호남지방을 손아귀에 넣을 계책을 쓸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대한 계획을 미리 세워서 수비를 잘하고 향도만 없으면 이곳을 거쳐서 기해(畿海)를 엿볼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조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졸로는 평야 지방에서 왜적과 장기(長技)를 겨루는 것은 원래 승산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조정의 의논은 왜적이 호해(湖海)의 제도(諸島)를 침공하리라 하여 영남지방을 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은 크나 큰 실책인 줄로 압니다. 전조에도 왜적은 매양 황산(黃山)의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성주, 대구 등지를 침략하였으며 경오년(庚午年)의 적도 또한 웅천, 제포 등지에 출몰하였으니 영남의 방어를 조금이나마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영남지방의 장력(將力)으로는 구하기가 어려운 곳인즉 명장을 선택하여 그곳의 원수(元帥)로 삼고서 방어하라고 책하심이 옳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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