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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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58)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6.09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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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부 욕심도 많고 나를 좋아했던 혜경이는 이대 국문과를 갔다. 멸치볶음, 오징어무침, 콩자반이 든 반찬 그릇을 열어보며 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졌는지 모른다. 그 혜경이가 결혼 후 시누이와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고 시누이와 우연히 나를 두고 대화를 하다 각각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어찌나 학교 시절의 내 칭찬을 많이 해 놓았는지 혜경이 덕에 시집에서의 내 위상이 갑자기 올라갔다. 그랬던 친구는 그 후 암투병을 하다 내게 한없는 슬픔과 눈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또 기숙사에 발이 닳도록 찾아와서 매번 명동에 함께 나가면 언제나 “우리 명동 영양통닭구이 먹을까?” 하며 통닭구이를 사주던 친구 혜숙이, 나는 그 이유를 꿰고 있었다. 혹시라도 기숙사에서 먹는 것이 부족할까 하여 볼 때마다 비싼 통닭구이를 시켜주곤 했다. 혜숙이는 중학교 시절 내가 테니스 선수로 운동하다 지쳐있어도 시험 때만 되면 무조건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혜숙이 뿐만 아니라 식구 모두 내가 가면 식구처럼 반가워하며 언제나 귀한 삼계탕을 끓여주셨다. 나는 삼계탕이라는 음식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마도 혜숙이가 그때 삼계탕을 끓여주던 그 기억으로 나에게 늘 비싼 영양통닭구이를 사주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내가 친구 얼굴을 보며 “너 오늘 바른 립스틱 색깔 참 예쁘다.” 했더니 “그래?” 하고 있다가 헤어질 때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어 “이 색깔 예쁘다고 했지? 너 발라.” 하면서 놓고 가버렸다. 한번은 겨울에 기숙사에 찾아온 혜숙이가 실내 보일러가 너무 따뜻해서 오버코트를 벗어 놓길래 “그 코트 참 멋지다. 어디서 샀니?” 하고 무심코 물었더니 “멋져 보이니?” “응.” 하고 시시덕거리며 이야기하고 놀다가 일어났다. 그런데 코트를 둔 채 스웨터 바람으로 그냥 가려고 했다. 잊고 가는 줄 알고 코트 입고 가라고 소리쳤더니 뒤돌아서 하는 말이 “나 는 코트 또 하나 있어. 네 맘에 들면 너 입으라고 놓고 가는 거야. 아까 멋지다고 했잖아.”하고 그냥 가려는 친구를 붙잡아 옷을 갖다 주었다. “오늘 그렇게 춥지 않아서 괜찮아.” 하며 내 손을 뿌리치고 현관을 잽싸게 나가버렸다. 

친구가 가진 것을 좋다는 말만 하면 가지라는 통에 이후부터는 예뻐도, 멋져도, 좋아도 솔직하게 표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혜숙이는 내게 학생 때부터 여러 번 나에게 “나 같은 애는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으면 안 돼. 너는 국가를 위해서라도 시집가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해. 너 닮아 머리 좋은 애를 많이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니까.” 하며 진심으로 인정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했다. 나의 장점을 자신보다 더 사랑해주고 좋아해 주고 흐뭇해하던 친구였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그 친구에게 공부 좀 같이하자고 해서 시험 때 집에 같이 가준 것 밖에 없는데, 그 친구는 물질도 마음도 아낌 없이 주는 친구라는 것을 마음 시리게 느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성적을 나눌 수도 없었다.

나도 그 친구도 결혼했다. 나는 시집에서 3년 살고 분가하여 삼성동 해청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혜숙이는 변함없이 우리 집에 들러 내가 결혼해서 사는 모습에 흐뭇해하고, 나의 큰아들 크는 모습을 보며 제 아들이나 되는 것처럼 예뻐했다. 

당시 버스 승합회사 경리과장으로 일하던 혜숙이는 늘 늦게 퇴근했다. 나는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 친구를 위해 친구가 우리 집에 온다고 전화하면 김구이, 나물무침, 갈치구이, 김치 등등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반찬을 만들어 놓았다가 친구가 집에 갈 때 내밀면서 “혜숙아, 결혼하면 남편이 너를 믿고 기다릴 텐데 이렇게 늦게 집에 가면 반찬을 할 시간도 없잖아. 반찬없이 대강 상을 차려주면 좋아할 남편이 어디 있겠니?” 하고 한마디 하며 반찬 서너 가지는 챙겨주면 고맙다고 받아가곤 했다. 

그렇게 나는 친구가 오는 날이면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사와 친구 몫까지 챙겨 찬합에 담아 보냈다. 유난히도 바싹 마른 약한 몸에 직장 다니느라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더 체중이 준 것 같아 안타깝고 안쓰러워 반찬이나 챙겨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당시 버스 회사들이 잘 나가던 때라 혜숙이는 경리과장으로 있으면서 그 사업에 관심이 컸다. 하루는 내게 와서 “우리 회사가 요즘 사업이 잘되어 수익금이 대단해. 그래서 나도 회사에 투자를 좀 하려고 하는데 네가 잠시 내게 투자할 돈을 빌려주면 조금 있다가 갚을게.” 라고 했다. 평소에 1+1은 반드시 2이고 누구보다 바르고 정직하고 올곧은 혜숙이의 모습만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나였기에 친구 말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때 마침 학교를 그만두고 돌이 갓 지난 큰아이를 키우느라 바깥출입도 잘 하지 않고 집에서 거의 아들과 지냈다. 친구든 동문이든 밖에서 만나자고 하면 늘상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서 집에서 중국 음식을 시켜 먹곤 했다. 아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면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아서 만사 제쳐놓고 삼시 세끼 먹이는 일에만 몰두하고 살던 때였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친구에게 “내가 애 때문에 은행을 갈 수 없으니 내가 통장과 도장을 너에게 줄게. 네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다 가져가.” 하고 통장과 도장을 친구에게 주었다. “그래도 돼?” 하는 친구에게 “그럼. 뭐가 달라? 은행에 내가 가든 네가 가든.” 하며 정말로 나는 내 말 그대로 나와 친구를 조금도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믿고 지내온 친구였다.

그렇게 친구는 사업에 손을 댔고 처음엔 잘 된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교통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친구는 차츰 내게 와서 사업 이야기는 화제에 잘 올리지 않았다. 나도 친구가 신경 쓰고 스트레스받을까 봐 일부러 일체 사업 이야기는 묻지도 않고 지냈다. 그럴수록 친구가 힘들어할 것 같아 반찬 한 가지라도 더 만들어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집에 와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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