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79)
상태바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79)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08.25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천문을 보고 왜적의 움직임을 예언 

조헌은 위로는 천문을 보았고 아래로는 인사(人事, 세상 일)를 살펴서 변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다. 그가 마을에서 동네 부인들로 하여금 돌을 광주리에 담아 그것을 머리에 이고 날마다 산판(山坂)을 오르내리게 하였다. 이 괴이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수고스러움을 머리에 익히게 하여 장차의 변란에 대비하려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우스꽝스럽게 여겼다.

1591년 7월 2일. 금산군수(錦山郡守) 김현성(金玄成)을 찾아보았다. 이때 박정노(朴廷老)라는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박정노는 조헌의 문인으로 다음 해에 중봉의병에 참여한다. 그는 영벽루(映碧樓)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금산 군지에 의하면 영벽루는 군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영벽루(映碧樓) 기(記)에 “서대산이 북쪽을 지키고 진악산이 남쪽을 기렸으며 서쪽에는 대둔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병풍같이 빙 둘러 솟았다. 금천의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 영벽루 뒤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이 되니 산 빛과 물빛이 종횡으로 짙고 푸르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방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누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영벽루의 절경에 취해 있을 때에 어느덧 한낮이 기울어 오후 3시 가량 되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붉은 요기(妖氣)가 동쪽 하늘에서 일어나더니 세 갈래로 나뉘어 한 줄기는 북쪽을 향하여 길게 뻗었고 또 한줄기는 서쪽으로 향했으며 또 다른 한줄기는 서남간으로 길게 뻗었는데 그 빛이 매우 밝았다. 이것을 본 조헌이 박정노(朴廷老)에게 “수길(豐臣秀吉)의 군대가 이미 행동을 개시했으니 명년 봄에는 이 적기(赤氣)와 같이 대거로 우리 땅에 침범할 것이다. 나는 장차 모친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할 것이니 자네도 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이튿날, 김현성(金玄成)에게 어제 있었던 천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라감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전문(轉聞 간접으로 전함)하여 급히 방어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청했다. 김현성은 조헌의 요구대로 상세한 도형(圖形)을 그려서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光)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이광은 이를 묵살하고 어떤 대책도 없었고 조정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조헌의 왜란에 대한 예고는 1589년 함경도 길주 유배지에서부터 한결같았다. 그는 왜적의 침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매사에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선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1월에 공주 공암에 있는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세상을 떠났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제자로 그곳에 서원을 내고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기는 토정 선생의 주선으로 교분을 맺게 되었고 나이 차이는 있었으나 가까운 벗으로 지내는 관계였다. 

1573년 교서관 정자로 향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고 있을 때 불사(佛事)에 향을 올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로 차마 봉향을 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논향축소(論香祝疏)를 올리자 노한 선조가 조헌을 파직시켰다. 이때 토정 선생과 더불어 두류산을 유람할 때에 서기도 함께 했다. 

1587년에는 일본에 사신이 들어와서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라는 청참왜사소(請絶倭使疏)를 직소(直疏)한 일이 있었다. 조헌의 상소를 받고 노한 선조가 소장을 불태워 버렸다. 그가 옥천으로 내려오는 길에 공암에 있는 서기를 방문한다. 서기는 직소를 한 것은 잘못이라고 조헌을 꾸짖었다. 그러나 조헌이 건네주는 소장을 읽고 나서는 갑자기 의관을 바로한 후 재배하고 “공의 이 소(疏)에 의존하여 우리나라는 장차 화를 면할 것이다”라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서기는 조헌이 토정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을 때부터 오랜 기간 학문과 우정을 나눠온 사이였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을 뜨신 것이다. 조헌은 서기를 조상하고 옥천으로 돌아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