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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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8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3.01.19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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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00점 맞은 날이면 신발도 채 벗 지 않은 채 한 짝 신발을 신고서 “엄마 나 100점 맞았어!”하고 마루 위로 뛰어 올라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끄덕하시며 주름진 얼굴이 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 다. 어머니의 그 모습이 제게는 크나큰 기쁨이고 보람이었기에 저는 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도 꼭 100점을 맞아야 했고 공부를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딱 하나 섭섭함도 있었지요. 왜 우리 엄마는 100점을 맞아도 다른 애들처럼 잘했다는 칭찬을 안 해주시나? 하고요. 제가 그 질문을 어머니에게 드린 것은 한참을 참고 지낸 후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엄마 딸이니까 네가 100점 맞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엄마는 네가 공부를 잘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시골에서 입학 안 시키려고 형편상 1년 늦게 대전으로 데려와 월반을 시킨 거지.” 하셨지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중학교 입시에서 수석합격 했을 때보다도 국가장학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게 되었을 때가 더 기뻤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때 저는 속으로 어머니께서 얼마나 돈 때문에 혼자 힘이 많이 드셨을까 생각하며 앞으로도 공부를 잘해서 어머니께 계속 효도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적성과는 전혀 다른 간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전액 장학금과 숙식이 제공된다는 큰 혜택이 있는 메디컬센터 간호대학의 매력이 하나의 이유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원하면 누구나 미국, 캐나다로 해외 취업이나 이민까지 갈 수 있다는,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특전도 있었고요. 저는 간호학이 맞지 않아 입학한 직후부터 눈물로 일기장에 속마음을 쓰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께 는 한 번도 그런 티도 낸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께서는 저희를 키우는 동안 싫음과 좋음, 기쁨과 슬픔을 겉으로 내색하는 적이 별로 없으셨지요. 그 힘든 세월 동안 슬픔과 괴로움이 교차하고 외로움의 열병으로 수많은 밤을 앓으셨을 텐데도 저희 앞에서는 어머니는 늘 같은 표정으로 안정감을 주려고 참아내셨습니다.

아파도 아픈 사실조차 숨기고 저희 몰래 두통약을 드시는 것을 알아 챈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뇌신이라는 두통약 상자가 가끔 나오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계신 것을 알아차렸지요. 아마 어머니의 그 질긴 인내심과 참아내는 힘은 그 지독하게 힘들었던 피난살이와 시집살이에서 훈련받은 훈장이 아니 었나 싶습니다. 저도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합니다. 저도 웬만하면 참고 어지간한 일로는 내색을 잘하지 않는 편으로, 제게 주어진 일은 불평할 시간도 없이 그저 묵묵히 참고 살아왔으니까요. 이 모두가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이겠지요.

오빠의 결혼에 이어 저의 결혼식을 홀로 치르면서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저로서는 감히 표현조차 두렵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남들이 짐작도 할 수 없는 고생과 심적 고통을 안고 오직 고진감래만을 위해 사신 덕분에 저희 4남매는 각자가 제 인생을 갈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다들 어머니께서 혼자서 아들 서울대 상대 보내고 막내딸까지 이화여대를 나와 제구실을 톡톡히 하는 자식들로 키웠으니 정말 성공하신 거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어머니의 뼈를 깎는 희생과 헌신적인 모성애가 아니었으면 풍전등화 같았던 저희 4남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정말 너희 어머니는 대단한 여자이다. 고생 한 번 해보지 않고 산 너희 엄마가 4남매를 혼자 키울 생각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4남매를 혼자 키운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네 오빠는 물론 막내까지 이대 약대를 졸업시켜 이렇게 훌륭한 아들, 딸들로 키워놓았구나. 물론 너희가 머리가 좋아서 다들 대학까지 장학생으로 다녀 등록금 걱정은 안 하고 학교 보냈다 소리는 들었다만 내가 그 고마움을 죽기 전까지는 있는 힘을 다 해 보상해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힘들었지만 화목했고 가난했지만, 저희 마음은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음만은 부자로 살아왔습니다. 오빠는 남부럽지 않은 능력과 다재다능한 천재성으로 일찌감치 자수성가의 길을 갔고, 그때부터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한결 편해지실 수 있으셨지요. 오빠도 올케도 워낙 심성이 착하고 약한지라 부모님께는 효자 노릇을 하는 아들이었으니까요.

제가 결혼할 때도 어머니는 사윗감이 맘에 든다면서 저보다 오히려 서둘러 성사시켜 주셨지요. 그런 덕에 소개받은 지 35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믿지 못할 사건이 아니었는지요?

그럭저럭 저희 4남매가 결혼하여 손자, 손녀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50대 후반에 다시 아버지와 만나 신혼 아닌 신혼생활을 하시며 사는 모습을 보며 저는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함을 드렸는지 모릅니다. 크게 웃지도 않고 늘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외손자 석원이, 경훈이를 세상에 없는 손자로 자랑스러워하시고 사랑해 주시던 모습. 지금도 보이는 듯 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위암이라니,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 가톨릭성모병원에 급히 입원하셨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던 가톨릭대 최의순 간호대학장의 소개로 위암 수술 전문의로 유명한 당시 병원장이셨던 김인철 박사님을 소개 받았고, 바쁘신 원장께서 주치의가 되어주는 은혜도 있었지요. 검진결과를 가지고 김 원장님은 제게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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