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아정(雲雅亭)
상태바
운아정(雲雅亭)
  • 김양순 수필가
  • 승인 2017.03.16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열흘 낮달이 잔잔한 호수의 조각배처럼 어여쁘다. 머뭇거리는 여름 해를 배웅하려고 이른 걸음을 했나보다.

운아정(雲雅亭), 맑고 아름다운 구름이 머무는 곳, 우리 동네 작은 공원에 있는 육모정 이름이다. 심산유곡 깊은 곳에 있어 발길이 뜸한 화려한 누각보다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도심 속의 쉼터가 훨씬 실속이 있다. 방학을 맞아 심심한 아이들이나 무료한 일상이 지루한 어르신들에게 사랑방처럼 편안한 곳이다. 다양한 운동기구를 설치해 놓아 오고가며 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요즘 나도 시간만 나면 그곳에서 책도 음악도 듣는다. 무더위를 피해 나올 수 있는 곳이 집 가까이에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잣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은행나무 등등 대충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고 어림잡아도 십여 가지가 넘는다. 하늘이 다 가려질 만큼 울창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얼마나 청량한 지 여느 삼림욕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반 음지 식물을 촘촘히 심어놓은 게 전문가의 솜씨인 것 같다. 옥잠화, 매발톱, 비비추, 맥문동 등 여러해살이 장맛비에 말끔하게 샤워를 했다. 얼마나 싱그러운지 손가락을 퉁기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것 같다. 더위에 지친 마음과 몸을 정화시켜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차랑차랑한 매미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고 싶을 만큼 시원하다. 마치, 시골 원두막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놀이터인 이곳은 언제 페인트칠을 했는지 모르게 빨갛게 녹이 슨 그네와 한 쪽 귀퉁이가 무너져 버린 미끄럼틀이 전부였고, 비가 오는 날이면 물웅덩이가 생겨 신발을 적셔야만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숲이 우거져서 아침마다 고운 새소리에 잠을 깨고, 꼬리를 치켜든 청설모가 잣 방울을 물고 다니는 걸 가끔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 곳이어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가을이 깊어지면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들추고 그 열매를 줍는 재미도 제법 쏠쏠한 곳이다.

지난봄에 낡은 놀이기구를 들어내고 땅을 파헤치는 공사를 시작했었다. 밤낮없이 뚝딱거리며 공사를 할 때만 해도 날리는 먼지와 시끄러운 중장비 소리에 귀를 막곤 했는데 말끔하게 새 단장한 공원은 이 동네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새벽이나 늦은 밤 아무 때나 서성일 수 있어 우리 집 정원처럼 다정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성가실 때도 있지만 검은 숲 어딘가에 머물 곳을 마련한 새들의 노랫소리에 마음자리가 잔잔해짐을 느낄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시소며 그네, 미끄럼틀에 연두와 노랑, 분홍으로 색을 입혀 동네가 다 훤해졌다. 동화 속 궁전처럼 꾸며놓은 놀이터에는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나이가 들면 아이들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어지간히 늙었나보다. 누구네 아이 할 것 없이 다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니 말이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등의 전시 행정이 아닌 주민들 삶의 질에 무게를 둔 알찬 행정에 감사한다. 곧 재건축이 될 곳에 예산낭비라고 반기지 않던 무색하게 할 만큼 누구나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잿빛의 지붕을 타고 내린 여섯 각의 처마 끝이 잘 세운 버섯 콧날처럼 날렵하다. 천년고찰 못지않게 유려한 자태를 뽐낸다. 목판에 음각으로 새긴 운아정(雲雅亭)이라는 글씨도 선비의 기품처럼 고고한 맛을 자아낸다.(내 눈에만 그런가?)

난간에 기대 앉아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드는 바람을 불러들이면 신선이 따로 없다. 한낮에는 찾는 사람이 많아 다소 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세대를 아우르며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깊은 그늘이 있고 두 다리 쭉 펴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우리 동네를 한껏 자랑하고 싶다.

살아오면서 세상에 기여한 것도 없는 내가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 한다. 아울러 세상에 빛은 되지 못하더라도 빚은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쉼터에 나오신 어른들의 가벼운 간식이나 물을 준비하는 일, 아이들 놀이터에 뭐 위험한 것은 없는지 살피는 일, 거동 불편한 어르신과 말벗을 해드리는 일 등등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찾아보려 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다보면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운아정(雲雅亭)! 아름다운 아름답게, 선한 이웃들이 따뜻한 미소를 나눌 수 있는 평화롭고 향기로운 정원이었으면 좋겠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던 옛사람들처럼 서로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쾌적한 공간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약력

·대전대학교 평생교육원 수료

·『수필시대』 신인상 등단

·옥천문인협회, 창하문학회 회원

·〈용운마을〉 신문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