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년을 기다려 너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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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년을 기다려 너와 만나다
  • 박은주 시인
  • 승인 2019.03.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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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시인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길게 이어진 골목이 그대로 시장이다. 천막에서 천막으로 지붕이 이어지고 양 옆으로 늘어선 가판대에는 바다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누리던 것들이 주인의 취향대로 늘어선다. 얼음 위에 누워있는 물고기 떼를 지나면 야채와 제철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고, 튀김이나 떡, 꼬치 같은 간식을 파는 가게가 이어진다. 팬티와 양말로 이루어진 언덕 옆에서도 젓갈과 나물 반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요리라고는 인스턴트식품을 데워먹는 것이 전부인 나는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다 빈대떡에 막걸리를 들이켜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김과 마른 멸치는 퇴근 후에 혼자 소주를 마실 때 안주로 잘 어울리니 넉넉히 사놓는다. 신선한 야채가 눈을 사로잡기도 하지만 가끔은 기름이 잔뜩 묻은 한입거리들이 몹시 당길 때도 있다.

좁은 골목에서 천천히 걸으면 어김없이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친다.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고 고개 숙이면 사람들의 장바구니가 들여다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요리를 해 먹을까 상상한다. 저 사람은 오늘 해물탕을 하는구나. 가족들이 모여 앉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해물탕을 떠먹으면 제법 맛나겠구나. 저 사람은 배추김치를 담그려나 보다. 김장김치는 많이 쉬었을 테니 겉절이를 만들어 먹으면 입맛 당기겠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뚝딱 요리 하나를 만들어 침을 삼키게 한다.

막걸리를 마시고 들뜬 기분으로 걸어 나오다 배추 값을 흥정하는 손님 곁을 지난다. 가게 주인은 한쪽 눈이 심하게 찌그러져 만화영화에 나오는 해적 선장처럼 보인다. 날카로운 눈빛과 달리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님을 부른다. 그는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푸르고 싱싱한 배추를 꺼내놓는다.

“이렇게 싱싱한 놈은 다른 데서는 못 만나요. 이것 좀 보슈.”
한 그물망에 나란히 잡힌 배추 세 포기를 끌어당기며 아저씨가 말한다.
“이놈이 3만 년을 기다려 여기 왔다니까.”
“아이고, 아저씨. 말도 참 재밌게 하시네.”

배추를 기다리던 중년 여인이 주인의 말에 까르륵 웃음을 내민다. 면벽수행이라도 한 듯한 주인의 말에 어느새 내 눈길도 배추에 머문다. 3만 년을 기다려 나와 마주보게 된 배추라니. 나는 바닥에 쌓여있는 배추 더미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만나기까지 고작 3만 년을 기다렸을까. 우주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원시바다에서 처음 생명체가 출현한 뒤로 줄곧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깊어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잊었을 뿐이다. 지금 여기서 배추와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숨결이 스쳐 갔을까. 태양과 달과 비와 바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 수많은 생명들, 땀 흘리고 한숨 쉬던 사람들의 손길까지 거치고 나서 만난 것이다.

오늘 아침 샤워하다 문득 이 뜨거운 물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했을지, 물이 물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행과 인내가 필요했을지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도 너와 만나게 될 전조였나 보다. 여기서 너는 배추로, 나는 사람으로 서 있지만, 다시 3만 년이 흐른 뒤 너는 두 발 달린 짐승으로 나는 벽돌로 마주보게 될지 모른다. 먼 옛날 너와 내가 한 몸이었을 때도 있을 테니, 무수한 순환을 거듭하고 나면 다시 한 몸이 될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제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나는 중년 여인의 손에 들려 흔들리는 배추를 따라 걷는다. 시장 입구에서 배추는 내가 가야 할 길과 반대편으로 돌아선다. 나는 배추가 횡단보도를 건너 주차장이 있는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그림자를 쫓다가 오래된 연인과 이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기 몫에 마음 다하다 보면 그리움이 또 다른 그리움으로 빛날 때가 오겠지. 나를 기다리던 ‘너’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그때까지 나는 잊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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